하나
저는
아주 고집이 센 놈입니다. 그리고, 과학을 너무나 좋아하기에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믿지 않고, 믿으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내용인 물고기 몇 마리로 수 천명을 먹이고 남기고, 병을 고치신 예수님의 기적 보다는, 과학이나 의학논문 등에서 어떤 치료법이나 약물을 투여했더니, 기존의
치료법 보다 20% 이상의 효과가 있었다는 등등의 검증된 결과를 더 믿는 놈 이였습니다. 종종 병원에서 환자들이 불치병으로 치료된 사례와 관련된 내용의 글을 읽을 때에도, ‘저거 진단이 제대로 된 거 맞아? 조직Sample이나 영상검사 자료 다른 환자와 바뀐 거 아냐?’ 종종 이런
일이 병원에서 벌어지고 있고, 제 일이 아닌 남의 일이기에 크게 다가오지 않았고, 더 믿음이 생기기 보다는 제 고집은 더 굳어져 갔습니다. 하지만, 몇 주전, “믿음”과
관련된 목사님의 말씀이 있으셨던 날이었습니다. 거의 목사님 말씀이 끝나갈 즘에, 제 뇌리를 스쳐가는 한 사건이 있었고, 그 말씀이 끝날 때까지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애써 눈물을 멈추고, 아무일 없었던
것처럼 오후 시간을 지내다가 잠자리에 들었을 때, 아내에게 말을 꺼내기 시작했습니다. 말을 마친 후 아내도 저도 한 참을 울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는 감사와 ‘너무나 늦게 깨닫게 됨에 대한 사죄’를 드리고 잠에 들었습니다.
2008년 5월. 호주로 유학을 준비하고 visa를 기다리고 있던 상황 이였습니다. 장인어른께서 갑자기 피를 토하셔서 응급실로 오시게 되었습니다. 약주를
즐겨하셨기에 어쩌면, 예상된 상황이기도 했습니다. 위내시경을
해서 출혈부위를 찾아서 멈추게 하는 치료를 받으시고, 몇 일간의 입원치료를 받으시게 되었습니다. 입원하신 후에 위내시경 검사 중에 조직 검사를 하시게 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위는 주름투성인 장기이고, 보통의 경우 위출혈이 있을 경우에 위의
점막이 부어있고, 이상부위를 찾기 정확히 힘들어서 조직검사를 거의 진행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나중에 내시경을 담당했던 내과교수에게 물어 보니 “안 할려다 했다.”고 했고, 전혀 저의 장인어른이란 것을 몰랐다고 하셨습니다. 특별히 이상이 없을 것으로 생각했던 조직검사 결과는 위암으로 나왔고, 위암의
병기를 결정하기 위한 CT, PET 등등의 검사를 했고, 위암병기 2기로 진단이 내려졌습니다. 위암절제수술 후에 경구용 항암제 몇 개월
정도면, 아무런 문제 없이 완치가 되는 병기였습니다. 불행
중 다행이라는 심정이었고, 장인어른께서는 수술을 위해서 외과로 전과가 되었는데, 2기 정도의 위암의 수술은 특별한 문제가 없는 한 수술집도의의 차이는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다들 바쁜 것을 알기에 특별히 K교수에게 부탁을 드리지는 않았는데, 외과 팀 자체 내에서 제 장인어른이신
것을 알고, K교수에게로 맡기셨고, K교수도 “정선생 친척이니까 해주는 거야.”하는 말 한마디만 하시고, 기꺼이 담당교수로 자처해 주셨습니다. K교수는 위암치료의 내시경
수술 전문가로, 자신의 이름을 딴 수술 technique이
있을 정도로 세계에서 손 꼽히시는 분이시고, 제가 옆에서 지켜본 바로,
의사로서 수술에 대한 것 뿐만 아니라, 털털한 인간적인 면과 겸손한 마음씀씀이 때문에 제가
존경하는 분 중의 한 분이셨습니다.
수술
날, 장인어른과 함께 수술장에 들어가서, 담당 마취과 교수와
수술장 간호사에게 인사를 드리고, 수술준비가 차차 진행되었습니다. 집도의인 K교수가 수술장으로 들어오고, 수술이 시작되는 것을 보고, 모두에게 편안한 마음으로 수술을 하시라는 마음으로 저는 휴게실로 가서 잠시 쉬고 있었습니다. 30분 정도가 지나서, 수술장 간호사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교수님께서 잠시 들어와 달라고 하십니다.” 저는 ‘아니 벌써! 실력 발휘하셨네. 위암
절제한 부위를 보여주시려고 하시나 보다.’ 생각하며, 수술장으로
들어갔습니다. 들어가자 마자, K교수의 눈빛과 마추쳤고, 저는 분위기를 살펴보기 위해서 수술을 도와 주고 있던 전공의와 간호사의 눈빛을 살펴봤습니다. ‘아! 뭔가 잘 못되었구나.’하는
문장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고, K교수의 설명이 이어졌습니다. “정선생
보이나! 위암 덩어리가 위벽을 뚫고 나가서, 간 표면까지
침범했다. 4기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일단, 간표면 지지는 것으로 수술마치고, 회복하고 나면, 항암치료 진행하자.”
“예.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위암 4기. 3mm 간격으로 촬영한 CT나
암 진단검사의 최고의 기술이라는 PET-CT에서도 간으로의 전이는 나타나지 않았으니, 너무나 비참한 결과였습니다. 위암의 완치판정이라고 할 수 있는 5년 생존율이 50%에서 4%미만으로, 아니, 진단 후 6개월
내에 사망이라는 결과를 받게 된 것 입니다. 게다가 위암 4기라는
것을 모르고, 수술을 했으니, 간뿐만 아니라, 복강내의 모든 장기를 비롯하여 다른 장기에까지 암세포를 퍼지게 한 경우가 되어, 언제 사망하실지 모르는 상황 이였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우선, 아내에게는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고, 다만, 수술 후에 항암치료를 받아야만 한다는 얘기만 전해 주었습니다. 수술 후 회복시기에 위절제로 2/5만 남게 된 위로는 첫 식사로
나온 Yogurt하나도 채 드시지 못하셨던 장인어른께서는, 다행히 2개월 동안 식사량을 수술전의 50%까지 드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동안에 저희 visa는 나왔고, 아내는 호주 오는 것을 포기하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무슨 생각 이였는지 모르지만, 오히려 아내를 달래고 있었습니다. “이럴수록 호주로 가자.” 정해진 집도, 돈도, 직업도
심지어 visa하나도 안정되어 있지 않는 상황에서, 그 모든
것이 안정되어 있는 한국을 떠나 호주로 가자고. 뇌졸중으로 한 쪽의 팔과 다리에 마비가 와 있는 상황인
장모님, 건강이 좋지 않은 처남, 그리고, 6개월 내에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는 장인어른을 옆에서 보살펴야 할 모든 책임을 가지고 있던 제가 호주로 가자고
제가 아내를 설득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봐도 제가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오히려 지금까지 살아온 제 인생관으로 바라보면, 반드시 한국에서
이 모든 것의 치료적, 경제적 책임을 지고 지냈을 저였을 텐데 말입니다.
수술회복
후 외과에서 항암치료를 위해 혈액종양내과로 전과가 되었습니다. 담당교수는 주로 말기 암 환자치료를 맡아
하고 있던 젊은 교수였습니다. 말기 암 환자의 경우 입원해서 항암치료를 해야 되는 상황이 대부분 이기
때문에 힘든 경우가 많기 때문에 환자에게 많은 신경을 써주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지 때문에, 제 마음에
별로 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 이였습니다. ‘죽으라고 그러는 구나.’ 하는 생각 밖에 들지 않았습니다. 병원에 입원해서 진행된1차 항암치료를 받으시는 동안에, 장인어른께서는 오심, 구토 등의 가장 기본적인 부작용도 없이 잘 적응하셨습니다. ‘부작용이
가장 적으면서도 효과가 가장 좋은 항암제를 사용한다고 하더니, 효과가 좋군.’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2차, 3차로
진행되는 항암제 치료에 장인어른도 어쩔 수 없이 항암제 부작용으로 고생을 하시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저희가 지켜 봐 드린 것은 2차 항암치료까지 였고, 그 이후의 치료 등의 모든 책임을 뒤로하고 8월 29일 한국을 떠났습니다.
2009년 10월. 아내가 한국에 다니러 갔습니다. 그 기간 동안, 장인어른께서 정기적으로 병원을 가셔야 되는 일정이 있어서 함께 갔었다고 합니다. 수술 집도의였던K교수와 혈액종양내과 교수로부터 전해들은 말 “지금까지 외래 진료로 환자분을 볼 줄은 몰랐다. 이건 기적입니다.” 이 말을 접했을 때도 저는 수술 잘했고, 좋은 약으로 치료했으니까
당연한 결과라는 생각 뿐 이였습니다.
2013년 현재. 장인어른께서는
수술전의 상태만큼 식사와 움직임에 전혀 지장이 없으시고, 5년 생존율이라는 위암 완치 판정을 받으셨습니다.
몇
주전, “믿음”과 관련된 목사님의 말씀이 있으셨던 날이었습니다. 거의 목사님 말씀이 끝나갈 즘에, 아주 짧은 순간 이 모든 일이
제 뇌리를 스쳐갔습니다. 어떻게 진단 후 6개월 내에 사망이라는
것을 모면했고, 5년 생존율이10%미만에서도 살아나셨을까?
제
고집은 모두 무너져 내렸습니다. 제가 가진 모든 지식과 경험을 동원해도 이해와 답이 나오지 않는 상황에서
저는 “치료하시는 하나님,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받아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기도 조차 하지 않은 제게 이렇게 큰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에 감사를 드렸습니다. ‘모든
것 걱정 말고 내가 만들고 준비 해 놓은 곳으로 와라.’하신 그 분의 뜻을 알게 되었습니다.
둘
저는
꿈을 거의 꾸지 않았던 놈 이였습니다. 한국에 있을 때에는 1년에 1~2회 정도로 꿈을 꾸었는데, 모두 일명 ‘개꿈’이였습니다. 하지만, 제 아내는 결혼 전에 많은 악몽을 꾸었고, 결혼 후 에도 가끔 가위에
눌려서 소리를 지르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특히, 아내에게는
많은 경우에서 예지몽이나 하나님의 말씀과 관련된 꿈을 많이 꿉니다. 예를 들면, 아내가 일하는 nursing-home에서 아내가 마음 써가며 돌보신
분이 계셨습니다. 연세가 많으셔서 몸이 많이 굳어져 있으셔서 다른 직원들은 돌봐주기를 꺼려하는 분이셨습니다. 나중에 그 분이 돌아 가신 것을 알게 되었고, 그 분이 돌아가신
날 그 시각쯤에 제 아내의 꿈에 나타나셨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곳 호주에서 살아가면서도 우리의 많은 상황 상황들이 꿈 속에서 펼쳐지고,
해결의 실마리는 보여주었습니다.
한국에서
일요일이면, 아내와 함께 성당에서 미사를 드렸지만, 저는
아내처럼 그렇게 성실한 신자는 아니었습니다. 아니, 오히려, 입으로는 “믿습니다.”했지만, 제 생각과 마음은 저 멀리 딴 곳에서 방황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 옳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호주에 와서 살면서, 상식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참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엄청 큰 일이 생겼다면,
행운이라고 생각했거나 혹은 잠시 하나님께 감사 드리고 잊어버렸겠지만, 이런 작고 큰 일들이
끊임이 없이 생기는 것을 보고, 제가 아내에게 “신(하나님)이 존재하기는 하나 보다.”라는
말을 하게 되었고, 한국에서 보다는 조금은 성실한 신자가 되었지만, 크게
만족스럽지는 않았습니다.
부부는
서로 닮아가는 것인지, 이런 제게도, 아내와 같이 의미 있는
꿈을 꾸게 되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유명
남자연예인들의 술자리에 초대를 받는 꿈에서부터, 고 김대중대통령께서 주신 말씀, 호주 전 Prime Minister 였던 Julia Gillard를 야단치고, 박근혜대통령께서 차를 대접해
주기 위해 저를 직접 찾아주시는 꿈 등등.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정도로 제가 당신을 찾지 않으실 것을 아셨는지, 마지막에 MVP로써 제 꿈에 찾아오셨습니다. 그것도, 한 번 나타나시면, 고집 센 제게 큰 의미를 주지 못할 듯해서인지, 하루 밤에 두 번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분명한 목소리와 모습으로 당신의 존재를 제게 보여주셨습니다.
첫
번째 꿈에서, 하나님은 어부의 모습으로 나타나 셨습니다. 마르고
키가 큼 외모에, 상의는 전혀 입지 않으시고, 짧은 pants만 걸치시고, 이마에 머리띠를 하고 계시는 모습이셨습니다. 주위는 아주 깜깜했고, 모닥불 빛만 붉게 보였고, 쭈그려 않으셔서 석쇠에 물고기를 굽고 계셨습니다. 자세히 보니, 그 석쇠 안에는 있어야 할 물고기는 없고, 제가 있었습니다. 모닥불에 제를 굽고 계셨는데, 저는 전혀 뜨거움을 느끼지 않았고, 도망 가려 하기 보다는 오히려 제 몸을 그 곳에 맡기고 그 상황을 아주 편안하게 즐기고 있었습니다. 석쇠를 빙글빙글 돌리면서 하시는 말씀이 “저 물집이 터져야 할텐데……” 그 말씀을 듣고, 제 몸을 살펴보니, 온 몸이 물집 투성 이였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물집들이 하나 둘씩 터지면서, 저는 아주 시원함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 꿈에서, 누군가가 제게 큰 건물을 보여 주었습니다. 이
곳은 하나님과 소통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라면서. 그 건물은 아주 큰 cylinder 모양이었고, 파란색 하늘로 둘러 쌓여 있었고, 건물 밖에는 하얀 구름이 군데 군데 있었으며, 제가 볼 수 있었던
곳은 2개의 층뿐 이였습니다. 그 2개의 층 위쪽과 아래쪽에는 수 없이 많은 층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 건물의 바깥 쪽 에서 약 45도 각도로 내려 보고 있었습니다. 2개의
층 중의 위층에서는 노래와 기도를 하고 있었고, 제 아내가 그 곳에 있었고, 주변에 몇 몇 사람이 있었습니다. 아래층에는 제사를 위한 음식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한 송이 집사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제
아내가 마이크를 잡고 노래를 하다가 멈추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이거 저거 해
주세요.” 약간은 투정 섞인 말투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넌 기도를 그런 식으로 드리는 구나.’ 하며, 피식 웃었습니다. 그
순간, “왜 그러느냐?”하는 웅장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혹시 건물 안의 스피커에서 나오는가 하며 살펴 봤지만, 그 소리의
크기는 거기에 비할 바가 아니었습니다. 혹시 하는 생각에 고개를 돌려 뒤를 보니, 머리에 후광을 두르신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보통 체격에
큰 키, 180cm 정도, 긴 머리와 수염을 기르시고, 무표정 혹은 사무적인 표정 이였습니다.
첫
번째 꿈에서, 저를 굽고 계시면서, “저 물집이 터져야 할텐데……”하신 말씀은, 제게 너의 고집을 버리라는 말씀으로 생각됩니다. 화상으로 생긴 물집이 터지게 되면, 통증이 심해지고, 상처가 감염의 가능성이 더 커지기 때문에, 제 몸에 그 많은 물집은
제 고집을 뜻하는 듯 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의 꿈. 하나님과 소통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 바로, 수정교회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수 많은 다른 층에는 다른 교회와 성당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저를 이곳으로 인도해 주셨고, 하나 하나 깨우치게 해 주시고 계십니다.